[인터뷰] 거침없는 복음주의자, 청어람 양희송 대표

[인터뷰] 거침없는 복음주의자, 청어람 양희송 대표
기독교적 ‘독해력’이 필요한 시대, “기독교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2012년 09월 11일 (화) 00:39:41 오경환  메일보내기 )( shalom ) 

   
 
 

▲ 거침없는 복음주의자, 양희송 실장을 <미주뉴스앤조이>가 9월 5일 메릴랜드 자택에서 만나 복음주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미주뉴스앤조이 오경환

 

 

다양한 이슈가 넘쳐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그 속에서 기독교는 물론 시사 문제도 담아내며 이슈를 재생산하는 ‘스타’가 등장했다.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한 인재발전소 청어람아카데미(청어람, bluelog.kr)의 양희송 실장이다. 그의 ‘페친’은 5011명. ‘받아보기’ 기능으로 그의 글을 보는 사람도 1034명에 이른다. 6천여 명 이상이 그의 글을 본다는 얘기다. 

대학시절부터 서울대기독인연합, 학원복음화협의회, <복음과상황>, 청어람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 운동 저변 확대를 위한 사역에 매진한 복음주의자. 지난 7년간 한국 청어람 활동 1기를 마치고 2기를 준비하며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양희송 실장을 <미주뉴스앤조이>가 9월 5일 메릴랜드 자택에서 만나 복음주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는 양희송 청어람 대표와의 대화를 정리한 일문일답이다. 

- 한국 복음주의권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민 사회에는 낯선 이름이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이름은 양희송이며, 한국에서 청어람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높은뜻숭의교회가 예배당 없이 예배드리던 중, 청어람이란 이름으로 교육관을 구했다. 그 때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하는 중에 콘텐츠를 기획하고 소개하는 역할로 2005년도에 교회의 부름을 받았다. 

외부에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고, 기독인문학과 문화예술, 정치·사회이슈 전반을 다루는 강좌를 꾸준히 해왔다. 또, 실용적인 강좌로 소셜미디어나 사회적 글쓰기 및 사회적 기업 강좌를 다뤘다. 시민운동 진영에 있는 사람들과도 행사를 기획했고, 7년이 지나면서 교회 안팎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CBS와 공동기획으로 세상을바꾸는시간15분(세바시)을 시작했다. <복음과상황>에서 2004년과 2005년 편집장으로 일했고, 한동대에서 기독교세계관강의를 7년간 해왔다. 

- SNS쪽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다. 복음주의 싸이월드 클럽도 회원이 4천명, 트위터와 페이스북도 수천 명의 친구와 팔로어가 있을 정도이다. 특별히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있나. 

복음주의 운동을 해오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과 어떻게 잘 소통할까’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 그래서 더 절실했다. 과거 큰 조직을 만들거나 집회나 대회를 통해 갈증을 채웠다. 이제는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지점이 상당히 많다. 영국에서 공부할 당시 싸이월드 복음주의 클럽을 통해 여러 이슈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다. 

또, 신앙 공동체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고 꺼낼 수 없는 문제들을 클럽을 통해 나눴다. 몇 해 전부터 소셜미디어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 것 같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하나의 매체역할로 개인적인 동시에 공적인 역할을 하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크리스천이 오프라인이라는 교회 안의 공간에서만 모이는 부작용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바깥으로 비기독교인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 복음주의 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활동을 많이 해왔다. 특별히 중점적으로 가치를 두고 활동한 것이 있는지. 나름대로 평가를 내려 본다면? 

늘 재미있었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활동을 하려고 했다. 나는 스스로 ‘복음주의 운동가’라고 정의한다. (대학 시절부터) 내가 이해하고 생각했던 복음주의의 내용이 선교단체나 교회가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경험한 것보다 큰 무엇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외국 책들도 많이 찾아봤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서 스스로 복음주의의 폭과 넓이와 내용을 넓혀왔다. 이것이 큰 힘이 되었다. 대학 때에는 서기연(서울대기독인연합), 뜨인돌을 같이 만들었다. 때마다 필요가 느껴지는 부분들을 누군가 감당해야 하는데 누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는 마음으로 했다. 영국 유학을 통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이해했던 복음주의를 확인하고 그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큰 수확이었다. 그 이후에 더 신나게 새로운 일들을 시작했고, 그것이 청어람으로 이어졌다. 

- 복음주의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보자. 다음 세대의 복음주의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며 기독 지성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각 세대들을 이야기할 때 역할이 똑같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봐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대표성이 소위 교계 지도자들, 대형교회 목회자들로 과잉 대표되었다. 한 목회자가 교계 지도자로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패러다임이 저물고 있다. 

   
 
 

▲ "교계를 ‘처치 소사이어티’(church society)라고 한다면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리스천 소사이어티’(Christian society)라는 틀로 넘어가야 한다." ⓒ미주뉴스앤조이 오경환

 
 
교계를 ‘처치 소사이어티’(church society)라고 한다면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리스천 소사이어티’(Christian society)라는 틀로 넘어가야 한다. 교계라는 구조에서는 결국 교회를 대표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대표성으로 정치·경제 등 온갖 문제에 대해 발언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에선 정치 문제의 경우 기독교 정치학자나 실제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 시민운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그 역할들을 하는 것이 옳다. 목회자의 위치가 없어진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목회자는 목회자로 섬기고 도와야 할 부분들이 있다. 교계 외에 다른 영역들은 크리스천 리더십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모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임은 해당 분야의 신우회로 교제하는 정도이지, 기독 경영하는 사람들이 이론이나 신학적 통찰까지 나누는 데 까지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교계 패러다임이 기독교 사회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려면 지금 비어있는 각 영역의 크리스천 리더십을 세우는 작업들이 성공해야만 한다. 기독교 사회라는 그림이 중요하다고 보고, 할 수 있다면 그 역할들을 감당하고 싶다. 

“‘가나안 성도’ 교회 이탈 현상을 심각하게 바라봐야” 

-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사회적 신뢰도는 다른 조직과 기관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 김형국 목사(나들목 교회)가 교회에 출석하다가 현재는 다니지 않는 성도를 ‘가나안 성도’라고 언급해서 흥미 있게 들었다. 교회가 어떻게 이들을 포용할 수 있나? 

‘가나안 성도’라는 용어는 IVF 일상생활연구소 지성근 목사가 먼저 언급했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교회 2.0컨퍼런스에서 ‘가나안 성도’를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 가나안성도는 ‘안나가’의 표현을 뒤집은 것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는 구조적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 현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회를 오랫동안 섬겼던 이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이다. 일종의 부유(浮流)층이다. 서울의 대형교회에는 언제나 부유층이 유입된다. 또 하나는 비교적 젊은 세대로 교회에 헌신도가 깊지 않은 그룹들의 이탈이 있다. 그 이면에는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삶을 헌신할 만한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 것이 크다. 문화적, 지적, 도덕적으로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젊은 세대의 이탈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가나안 성도’이다. 

이들을 단지 불편함을 못 참고, 교회에 대한 애정이 많지 않고, 참을성이 없어서 교회를 뛰쳐나간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단순한 개인 성격과 적응의 문제보다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기독교 지성과 변증의 문제다. 지성이 무엇이며 사상과 시대적 흐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교회가 주지 않기에 지적으로 왕성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지적인 것을 포기하고 교회에 남아라’가 아니라, 교회가 수준을 높여야 한다. 또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설득력 있게 입증해야 한다. 교회에 모여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 개인의 인생과 사회,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형교회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조직적으로 신자를 관리한다. 이것은 의미나 보람으로 지탱되지 않고 조직관리만 남은 것이다. 교회론과 예배 그리고 선교에 대해 물어야 한다. 

-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는 대형교회에 수많은 지성인들이 존재하는데 여전히 대형화되는 현상은 무엇 때문인가? 또 조직 동원력과 재정이 풍부한 대형교회 목회자 그룹은 이탈현상을 심각하게 보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 같다.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대형교회 목회자는 스스로 원하는 대로 자원을 동원하고 방향을 이끌어나갈 힘이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세대교체 실패로 나타나고 있다. 정상적으로 세대교체를 하고도 후임자와 전임자가 갈등을 겪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고, 그걸 피하기 위해 세습을 한다. 그 동안 한 담임목사에게 모든 권한과 자원이 집중되는 방식이 교회 성장에 유용하다는 패러다임이 저물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론을 묻고, 교회 리더십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것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대형교회에 지성인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어이없는 결정을 하는 이유를 보면, 단순히 목회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빅딜’이 있는 것 같다. 양질의 목회 서비스를 제공받는 대신, 목회자의 독선을 용인해주는 암묵적 ‘빅딜’이다. 교회가 성장하고 편리해지고 안락해지지 않으면 성도들로부터 불평이 나온다. 이것이 상승작용으로 그 동안 작동했다. 

목회자의 잘못도 크지만 성도의 묵인과 방종 또한 한 몫 한 것 같다. 다음 달에 나올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과)와의 대담 중 이야기를 했던 것이 있다. ‘개신교 신앙이 개인과 공동체 중 어디에서 출발하는가’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많이 있는데 나는 속고 있다고 본다. 서양 같은 경우 중세에서 집단에 대한 반발로 개인주의가 15세기, 본격적으로는 계몽주의 이후부터 몇 세기 동안 충분히 개인의 강조가 있었다. 그 다음에서야 공동체에 대한 맥락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은 집단주의를 탈피해 본적이 없다. 

우리는 이제야 개인의 중요성,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려는 도중에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제대로 된 공동체가 아니라 집단주의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공동체주의를 이야기하려면 개인주의가 충분히 무르익은 성숙한 개인이 있는 가운데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강조가 무시되고 개개인의 인격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공동체는 집단주의에 불과하다. 

개인이 회복되는 것이 개신교 종교개혁의 기본적 원리에도 맞다. 사제가 매개 역할로 하나님과의 통로 역할을 대신했다면 개신교는 만인제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매개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런데 지금 하는 행동들은 중세 사제주의로 돌아간 측면이 많다. 개신교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사회적 신뢰도 회복이 급선무’ 

- 이민 사회 이야기를 나눠보자. 그동안 이민교회에 대해 어떤 것을 느꼈는가? 

세계 어디를 가도 한인교회가 존재한다. 이민교회는 맨 얼굴로 맨 몸으로 모든 걸 해결해내야 하니까 갈등과 사고가 생겼을 때 막을 수 있는 힘이 취약하다. 이민 사회의 기반이 취약한 것과 연결된다. 특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 모두 목회자가 너무나 많다. 

최근 통계에서 한국교회가 약 7만 8천여 교회, 교단·교파가 약 230여 개, 목회자가 12만 명 정도로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편의점이 작년 말 기준으로 2만개이다. 향후 10년 정도 지나면 한 4만개된다고 한다. 동네 어디든 편의점이 보이는데, 교회가 7만개면 과포화 상태이다.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조금 과하다. 기본적으로 목회자 숫자가 많고, 신학교에서 무분별하게 목회자가 배출되고 있다.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해외에서는 여지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소명 의식을 되찾고 심기일전하자고 말하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자생하기 힘든 분야에 수많은 사람을 몰아넣고 단체나 기관들이 난립한다면 기본적으로 이보다 더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생존경쟁이다. 그런 구조를 만들어 놓고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원론적으로 가면 교단·교파가 그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지만 그들이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거의 어렵다. 뜻이 있는 목회자들이 함께 다른 자구책을 만들어가야 되지 않을 까 싶다. 교회 내에서 리더십이나 운영이 투명성을 가시적으로 인증할 수 있는 기관, 사회적으로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한데 교단에 그것을 기댈 수는 없는 것 같다. 현재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신뢰받을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같다. 

- 이민교회 이야기 중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가 여전히 문제가 없는데, 교회가 힘이 없고 사회에 좌파와 언론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는가? 

전형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보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 내 음모론적 사고가 많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비판 받는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니까 배후에서 무언가 나쁜 것들을 만들어내는 합리적인 적들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언론의 보도태도의 편향성이나 안티기독교 모임이 존재하고 발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훨씬 저변에 일반 대중이 경험적으로 느끼는 것 때문에 반응하는 것이 많다. 그러한 적은 오히려 ‘막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적이 커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포나 두려움이 막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겁먹지 말고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해 나가야 한다. 

“교회가 정치적 독해력 키워줘야” 

- 정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정치 이슈에 대해서 그 동안 많은 토론에 관심을 보이셨고, 관련된 강좌들도 청어람에서 많이 진행됐다. 기독교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교회가 정치에 대해 바라봐야 하는가? 

정치는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 같다. 모든 개인은 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여러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고 또 잘하는 방식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교회 조직이 정당 조직과 직업 정치와는 구별되지만 정치는 필연적이라는 면에 있어 정치를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독해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치적 독해력을 가지고 시민적 교양, 신앙을 바탕으로 기독교 통찰이 가미돼 정치를 바라봐야 하는데 아직 개발이 안 된 것 같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더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측면이 많다. 그런데 지나치게 무관심해서 현상 유지(status quo)에 도움을 주거나, 특정한 지지 세력에 조직처럼 동원되어 극과 극으로 달리는 상황은 옳지 않다. 

역사적으로 개신교는 정치와 관련이 많다. 장로교 교회 정치 제도가 민주주의 권력의 분립과 견제를 만들어 내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개신교인이 민주주의 정치 작동원리를 모르는 것은 어색하다. 공공선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지가 가장 큰 집단이 개신교인데 정치적인 무지와 자신들이 서 있는 신앙에 대한 이해의 무지 때문에 정치적으로 무능한 상황에 다다랐다. 

- 대선이 100일 남았다. 기독교인은 어떤 태도로 투표에 정치적 독해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보는가? 

세 가지 정도 볼 수 있다. 일단 ‘리액티브’(Reactive)한 측면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신교가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권선거나 탈법 등이다. 또 ‘프로액티브’(Proactive)한 면에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남북평화문제나 양극화 문제 등 특정 정치그룹의 주제가 아니라 사회내의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정도까지 정책과 가치들을 만들어 내라고 교회가 이야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립적인 심판역할이 필요하다. 정치는 진영 간의 싸움이고, 게임이다. 그러므로 여러 갈등이 생기는데 사회적으로 누군가 중재역할을 하고 기준점을 잡아줘야 하는 일이 생긴다. 

사회의 원로나 언론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 안에는 새누리당, 민주당, 진보당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성원들을 가지고 있는 모임이라고 봤을 때,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심판 역할과 기준 역할을 잘 할 수 있다. 

문제는 최근 10년 동안 교회가 어떤 노골적인 의미의 정치를 해오면서 선수로 뛰었다. 한국 사회가 개신교에 심판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도 안하고 요구도 안 하는 비극적 상황이다. 교회가 궁극적으로는, 법과 정치 등 영역이 여러 갈등상황을 풀어내지 못할 때 최종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권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수준으로 보인다. 

- 미국 대선을 짧게 이야기해보자. 오바마 대통령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복음주의권내에 상당수 되고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는 모르몬 교인이다. 이 지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전망하는가? 

그림이 참 재미있게 되었다. 조지 W.부시가 두 번 당선될 때 전체 득표의 40%를 복음주의자들에게 얻었다. 소위 미국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표를 얻은 것이다. 이 때 복음주의자들은 신앙고백이 뚜렷하고 보수적인 가치들을 지향하는 이를 지지한다는 원칙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이것이 깨진다. 당시 복음주의 내에 세대변동이 크게 있었다. 젊은 세대, 소위 ‘이머징 처치 네트워크’(Emerging Church Network)같은 경우는 대다수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번 대선은 흥미롭다. 여전히 오바마 임기 중에 기독교인인가, 아닌가하는 논란도 있지만, 그걸 문제삼자니 공화당 후보가 모르몬 교인이기 때문에 보수적 기독교인에게 딜레마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표를 준 것이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보수적 가치에 헌신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준다. 

일례로 가장 큰 신학대학인 리버티 대학 졸업식 때 롬니가 방문했다.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롬니를 지지할 수 있는 상황으로 비친다. 결국 이것은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보수성을 산 것이지, 신앙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셈이다. 오히려 종교 문제보다 정책 대결 구도로 갈 가능성이 높다. 과거 부시가 당선되던 것 같이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내걸고 표를 얻는 방식의 선거전략이 성공하진 않을 것 같다. 

- 공교롭게도 한국 대선 유력 후보들 중 개신교인이 없다. 역시 같은 그림으로 볼 수 있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 ‘장로 대통령에 대한 열망’이 어떤 식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가를 보았기 때문에 똑같은 논리가 두 번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나 남북문제 같은 정책대결구도로 갈 것이다. 교회 입장에서는 ‘누가 예수 믿는 장로냐’ 이거 묻지 않고 정책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 같다. 그럼에도 몇몇 목회자는 노골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한다. 결국은 자기가 동의하는 이념과 노선에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데 신앙을 빙자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지연을 탈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종교연고주의를 탈피하려는 것을 교회에서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 양희송 실장은 현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세권의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큰 흐름과 방향을 최대한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의 책이 기대되는 이유는 앞으로의 사역에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엿 볼 수 있기 때문일까. ⓒ미주뉴스앤조이 오경환

 
 
양희송 대표는 현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세권의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에 대해 담은 책과, 개신교를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미래를 담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 마지막으로 강영안 교수와의 대담을 다룬 책이다. 

그는 큰 흐름과 방향을 최대한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의 책이 기대되는 이유는 앞으로의 사역에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엿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앞으로 청어람 2기의 사역과 복음주의 저변 확대를 위해 어느 지점이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힘쓰고 싶다는 양희송 대표. 미국에서 지낼 남은 시간이 짧게만 느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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